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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창선·삼천포 대교

화려한 야경 조명과 충경은 여행객들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하다.




남해고속도로 사천IC에서 3번 국도를 타고 삼천포를 거쳐 남해로 오기 위해서는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야 한다.


이 창선·삼천포 대교는 경상남도 사천시와 남해군을 연결하는 5개의 교량(삼천포대교, 초양대교, 늑도대교, 창선대교, 단항교)으로 늑도, 초양도, 모개도를 디딤돌삼아 사천시 삼천포와 남해군 창선도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창선·삼천포 대교는 총 길이는 3.4km로, 1995년 2월에 착공해 2003년 4월 28일 개통되었으며, 2006년 7월에는 대한민국 건설교통부가 발표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평안북도와 남해군 미조면 초전삼거리를 잇는 국도 3호선의 일부인 창선·삼천포 대교는는 늑도와 초양도, 모개도 및 창선도를 육지와 연결해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남해군 쪽에서는 기존의 남해대교와 함께 육지로 통하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어 기존 남해대교를 이용하는 것에 비해 부산·경남 각지와의 이동 소요시간이 크게 단축되었다.

특히 2003년 4월 1천750억원으로 완공한 총 연장 3.4㎞, 너비 14.5m의 창선.삼천포대교 내 5개 교량에 설치된 야간경관 조명은 단항교 아래 창선대교타운의 자동차 극장과 범선형 활어위판장, 사천시내 야경과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야간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어 여기를 지나는 여행자들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하다.



창선·삼천포 대교 입구에는 '창선대교타운'이라는 수협 활어 위판장, 레스토랑, 활어회 센터, 특산물 판매장, 자동차 극장 등의 시설과  사천시 삼천포 대교 입구에는 '삼천포대교 기념공원'이라는 공원이 있어 싱싱한 활어회와 주변 경관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특히 창선·삼천포대교 아래에 위치한 창선대교타운은 자동차극장을 비롯해 수협 활어위판장,유람선 선착장,농수산물 판매장,횟집타운 등이 들어선 신흥 관광 위락단지로 꾸며져 있으며. 바닷가 창문을 열면 화려한 조명을 밝힌 창선·삼천포대교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경을 구경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숙박시설이 즐비하다.

네비게이션 포인트 :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6-21번지  


남해 창선면의 왕후박(王厚朴)나무

천연기념물 제299호 <



1982년 11월 4일에 천연기념물 299호로 지정된 창선 단항 왕후박나무는 창선면 대벽리 699-8번지외 5필지에 걸쳐  707㎡ 면적과  높이 9.5m, 밑 둥 둘레 12.6m, 밑 둥에서 11개가지, 지면 부 둘레가 11m, 윗부분의 넓이동서 21.2m, 남북 18.3m에 걸쳐 자생하고 있으며,  녹나무 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서 수령은 약 500년이 된다.



구전의 의하며 약 500년전 이 마을에 늙은 부부가 살면서 할아버지는 매일 고기잡이를 하여 생계를 꾸려가던 중 어느 날 큰 고기를 한 마리 잡았는데 고기 뱃속에서 씨앗이 나와 이상히 여겨 씨앗을 집 앞 뜰에 심었더니 싹이 트고 자라서 현재까지 자란 것이 이 왕 후박나무이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잎이 맑고 사철 푸르며 빛을 반사하여 빛이 나므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이 나무를 신성이 여겨 매년 섣달 그믐날이면 동제를 지내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옛날부터 이 마을에는 대나무 숲이 많았다고 하며 이충무공이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 마을에 있는 대나무와 짚 등을 배위에 잘라 싣고 배위에 불을 놓았더니 대나무 마디 터지는 소리가 큰 대포소리 같아 왜적들이 놀라서 도망을 쳤는데 왜놈들을 뒤쫓던 우리 군사가 이 왕 후박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대나무로 막은 발(竹防簾) 죽방렴

죽방렴(竹防簾)에서 잡히는 칼슘왕 멸치

동해안ㆍ서해안ㆍ남해안 중 유일하게 고대어업의 한 어로 형태로 남아 있고 현재에도 어업행위를 하고 있는 남해군 삼동면 지족과 창선면 지족리를 잇는 창선대교 아래 강진만 지족해협에 설치된 고대어업 죽방렴의 정체는 과연 무었인가?

전시품인 아닌 생업의 한 수단이였다.





☞ 죽방렴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리고 어떤 고기들이 잡히나?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 갯벌은 수심이 약 3m∼8m정도인데 밀물 때는 물살이 아주 세기 때문에 길목에 발을 설치하는데 잡히는 어종은 멸치를 비롯하여 각종 다양한 어류가 잡힌다. 이곳에는 25기의 죽방렴이 설치되어 있다.

죽방렴은 수심이 얕고 물살이 센 지역에 발을 설치한다. 발을 고정시키기 위해 곧은 참나무를 주로 사용하는데 약 10m정도 높이로 곧게 다듬어야 한다. 양쪽 날개와 통발에 세워야 할 나무 수는 약 300여개가 소요된다고 한다.

우선 곧은 나무로 밀물 방향을 향해 V자 형태가 되도록 약2m간격을 두고 100여m정도 물 속 뻘 밭에 곧게 다듬은 나무를 박는다. 그리고 나무 안쪽에 대나무로 만든 발을 설치하고 원통 뒤쪽에는 고기를 어획할 수 있는 조그만 문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죽방렴에 하루에 두 번씩 썰물 때를 기하여 어장을 확인하고 잡힌 고기를 수확한다. 주로 잡히는 고기는 멸치이고 그 외 갈치, 고등어, 새우 등 여러 어종의 고기가 잡힌다.





특히, 멸치는 남해안 청정해역에서 잡히는 것보다 더욱더 고기 질이 훌륭하여 최고급 어종으로 분류된다. 어장에서 그물을 이용하여 잡으면 수확하면서 멸치의 비늘을 상하게 하고 몸체에 흠집을 내기 때문에 신선도가 떨어지지만, 죽방렴에서 잡히는 멸치는 물살의 흐름에 의해 비늘하나 떨어지지 않고 잡히기 때문이다. 또한 청정해역이고 물살이 센 곳에서 잡히는 고기는 고기 맛이 좋다. 수확된 멸치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고 곧바로 인근 해안으로 옮겨져 가마솥에 삶아지고 삶아진 멸치는 해안 바닷가에서 말린다.

가공된 멸치는 피로회복제 최고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칼로리는 396칼로리에서 432칼로리이고 칼슘과 인(燐)의 함량이 1위이다. 이렇게 죽방렴에서 잡힌 멸치는 수확량이 적기 때문에 판매될 경우 다른 멸치보다 3배에서 5배정도 값이 비싸지만 물량이 모자라는 편이다.



☞ 죽방렴의 원조 어량설치와 어로 행위가 중단되었던 시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이나 해안에 발을 설치하여 잡는 어량(魚梁)이 있었고 통일신라시대까지 성행했다』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유입된 후 불교가 국교로 정착되었고 신라ㆍ백제ㆍ고려에 이르기까지 살생을 금한다는 취지로 어로행위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백제 법왕(599년)과 신라 법흥왕(514∼539년)때는 아예 법령으로 살생 금지령이 반포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도경에는 『그물을 만드는 기술도 떨어지고 대부분 어량어업이나 해안에서 어류를 잡았으며 패조류의 비중이 높은 대신 어류는 하층민들이 주로 먹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 등을 볼 때, 신석기시대를 비롯하여 기원전까지는 어로 기구와 어로 방법이 상당히 활발하게 발달되었으나 삼국ㆍ고려시대에는 불교로 인한 살생에 대한 경각심 때문에 수요량이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업 방법은 발전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가 조선시대를 접어들면서 묶였던 어로행위가 해방되었다.

19세기 전반에 명태, 조기, 대구 등이 많이 잡혔고 특히 멸치는 남해안에서 집중적으로 잡혀 남해안의 주 어종이 되었다.



☞ 다시 시작된 어로와 재현된 죽방렴 그리고 체험관

조선시대 후반기부터 고기의 어획량이 늘어남에 따라 어망에는 면사(綿絲)가 사용되었고 어전(漁箭)의 설치는 대나무가 이용되어 갯벌 물길에 설치되었다. 구조는 방사형으로 양쪽 날개가 설치된 부분과 함정부분으로 구성된 형태이다. 이것이 바로 『죽방렴』인데 삼국시대에 설치한 어량과 비슷하기 때문에 죽방렴 기원을 삼국시대 이전으로 볼 수 있다.

흔히 생각하기를 죽공예가 발달하였고 대나무가 많은 서해안에 먼저 설치된 것으로 보이나 서해안에는 1기도 없고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곳은 바로 남해 지족해협이다.

서해안은 비슷한 어로 방법인 돌로 둑처럼 쌓은 『돌살』은 남아 있다.
삼동면 지족리 죽방렴 옆 해안에 죽방렴과 똑같은 모형의 죽방렴을 설치하고 구조와 어로행위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를 본 받고 잊혀져 가는 옛 어로행위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될 것이다.





















물건? 물건방조어부림이 물건일세

고기를 부르는 숲, 천연기념불 150호 물건방조 어부림

삼동면 물건리 바닷가에 초생달 모양으로 병풍처럼 서 있는 물건방조어부림은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천연기념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건 방조어부림(勿巾防潮魚附林)은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었으며,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39-3 주변  25,091㎡의 수림면적으로  좌우 길이는 약 1.5km,  넓이 30m, 높이 11m 규모로  해안 몽돌 밭을 따라 반원형으로 무성하게 고목으로 형성되어있다.



나무의 종류는 느티나무, 포구나무, 게엄나무, 마개목, 개가죽나무, 아구사리나무, 물재목, 구림목, 뽈동나무, 사람주나무, 벚나무, 때독나무, 소나무, 참나무, 돌배나무, 돌쨍이나무, 개방맹이나무, 유너리, 옻나무, 굴태나무 등으로 일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수령은 약300년이 된다. 숲이 이루게 된 동기는 바다 바람이나 해일 등의 피해를 막고 숲 그늘이 지면 고기들이 많이 모여 들기 때문에 숲이 조성되어 졌다고 한다.



숲이 조성된 이후에는 숲을 잘 보호한 결과 마을에 각종 재난이 없어졌고 해일 해풍 등을 막는데 도움이 컸다고. 전설에 의하면, 이 숲은 전주이씨 무림군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방풍림을 조성하였는데 100년 전(병술년) 흉작으로 이 숲을 벌채하여 수림의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200년 전에도 흉년이 들어 국가 공용전(公用錢)을 납부할 능력이 없어 수림을 벌채 매각하여 공용전에 충당하였던바 불의의 천연화재(天然火災)와 폭풍우가 닥쳐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숲을 헤치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어 그 이후로는 숲을 헤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경상대 논문집 중 「남해도의 수목(-노거수와 특수수림-)」에 의하면, 총 36과 51속 63종으로 상록활엽수 4종, 낙엽활엽수 59종이며 교목 29종, 관목 19종, 만목 15종으로 상당한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조사된 상록수로는 사철나무, 보리밤나무, 송악 등이고, 낙엽수로는 굴피나무, 개서나무, 상수리, 굴참나무, 폭나무, 참느름, 푸조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천선과, 구지뽕, 종깨잎나무, 으아리, 사위질빵, 댕댕이덩굴, 백동백, 일본까치밥, 까치밥나무, 고광나무, 국수나무, 팥배나무, 꼭지윤노리, 찔레나무, 멍석딸기, 복분자딸기, 자귀나무, 아까시아, 칡, 쉬나무, 초피나무, 에딕나무, 사람주나무, 광대싸리, 옻나무, 붉나무, 회잎나무, 화산나무, 말오줌대, 모감주나무, 무환자나무, 가마귀베게, 털갈매나무, 개머루, 가사잎개머루, 보리수, 박쥐나무, 말채나무, 고욤나무, 검노린재, 아팝나무, 쥐똥나무, 털마삭줄, 누리장나무, 계요동, 덜꿩나무, 괴불나무, 인동넝쿨, 청미레덩굴, 청가시덩굴 등이다. 



상주해수욕장에는 금산도 있고 3층 유람선도 있구나

연간 백만명 이상이 찾아오는 상주해수욕장

남해는 사면이 바다라 어느 곳인들 해수욕장이 아니겠는가?
전국에 알려진 상주해수욕장, 송정해수욕장, 사촌해수욕장, 월포 두곡해수욕장이 대표적인 4대 해수욕장이지만, 몽돌해수욕장으로는 선구 해안, 가천 해안, 물건해안, 천하 해안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여름 피서철 모든 곳을 소개하기로는 너무나 기나긴 여행을 떠나야 하기에 우선 전체를 대표해서 상주해수욕장과 그 주변을 소개하고자 한다.


연간 백만명 이상이 찾아오는 상주해수욕장의 모습은?

천혜의 큰 호수처럼 보이는 상주해수욕장의 뒤로는 영산인 금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크고 작은 무인도가 가로막아 성난 파도도 잔잔히 흐르도록 한다.
해수욕장은 바다와 모래 그리고 숲이 있어야 하는데 상주해수욕장은 삼위일체가 된 천연적인 곳이다. 모든 해수욕장이 그러하듯 반월형의 백사장의 모래는 2km에 달하고 은가루와 같은 모래는 눈을 부시게 하고 발바닥의 감미로운 감촉은 가렵기까지 한다.

바다 밑은 완만한 경사로서 수심이 얕은 지역은 어린이 물놀이하기에 적당하다. 물은 오염되지 않아 물밑에 있는 모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넓고 긴 백사장은 48,400평이고 수심은 0.5m - 4m. 수온은 23°C - 25°C로서 우리들 몸에 적합하다.

해수욕장을 감싸고 있는 2천700평의 울창한 송림은 해수욕을 즐기다 잠시 휴식하는 곳으로 잠시 앉아 해수욕장을 바라보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이 보인다.  상주해수욕장은 여름 피서철은 말할 수 없지만, 4계절 휴양지로서 봄과 가을에는 대학생들의 수련활동 장소로 이용되고 연인들의 추억의 공간으로 활용되어 지고 있다. 겨울에는 전지훈련장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4계절 내내 만남의 장소이다.

뒤쪽에 있는 금산의 산세가 쭉 뻗어내려 상주와 상주해수욕장을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은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안고 있는 형상이라 포근함이 있는 곳이다.

누가 이곳을 마다하겠는가?
서해바다와 동해바다를 늘 보고 있지만, 남해바다는 늘 품속의 아늑함을 느낄 수있고 나의 고장과도 같은 너그러운 품속이기에 다시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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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포 이충공 전몰유허(이락사) (사적 제232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지이며 순국지인 관음포만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
■ 지정번호 : 사적 제232호 
■  지정일자 : 1973. 6. 11. 
■  소 재 지 :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125번지 
■  규    모 : 이충무공유허비( 높이 187cm, 폭 75.5cm, 두께 22cm)   
■  부 속 물 : 이충무공유허비와 비각, 이충무공전적비, 첨망대(누각), 이충무공유언비 
■  시    대 : 조선시대 
■  관 리 자 : 남 해 군 
■  연    혁 : 
  1598. 11. 19.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장군 노량해전 중 관음포에서 순국 
  1832. 충무공 이순신장군 유허비와 비각 건립 
  1814. ~ 1903. 유허관리(김용해, 김계언, 김여홍, 김여복, 김여백, 깁정준, 김중순) 
  1950. 전적비 및 공사기념비 건립(군민성금으로 유허와 참배로 조성) 
  1965. 유허비 모각비 세움 
  1973. 사적 제232호로 지정 
  1980. 유허비 국역 청동판 세움 
  1985. ‘성웅충무공이순신유허’도로변 석비 세움(증 남해라이온스클럽) 
  1990. 첨망대 준공 
  1998. 충무공 이순신 유언비 건립 
  2005. 노량해전 영상관 기공
  
핏물로 붉게 물들인 역사의 현장 관음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호국 바다로 불린다.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라는 마지막 명령을 유언으로 남기고 순국하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지요 순국지다.
이충무공께서 순국하신 후 관음포(觀音浦) 비각에 고 박정희 대통령은 대성운해(大星隕海)를 현판 하였다. 일명 이락포(李落浦)라 불리어지고 있다. 이 곳 유허는 주변이 수려하고 풍요를 누렸던 유서 깊은 고장으로 왜구의 침입시마다 왜선과 왜구를 물리친 곳이며 호국충절의 얼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관음포를 내려다보면,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이 어느 곳과 다름이 없건만, 가슴 속에 묻혀 있는 과거 역사를 떠올리며 지난날들의 국난을 상기하면 잔잔한 바닷물이 용솟음치며 붉게 물들여 진다. 고려대장경판!, 삼별초!, 정지장군 관음포대첩!, 이순신장군 노량해전!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호국의 정신이 스며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2년 임진년에 명나라를 정벌하려는 야망과 1597년 정유년에 한반도 이남을 일본 영토로 만들려는 야심으로 조선을 침략한 7년 전쟁인데 노량해전은 최후 최대 전투이다. 1598년 8월 18일에 7년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病死)하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조선을 침략한 병사는 모두 철군하라!”는 유언에 따라 남해안에 주둔하였던 일본 군사와 함대는 11월 10일에 철수하기로 약속하고 순천 고니시군, 남해 소오군, 사천 시마즈군은 창선도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조명함대는 11월 9일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나로도에서 광양만으로 대 함대를 이동하게 되었고 일본함대는 11월 10일에 약속대로 창선도에 집결하였으나 순천 고니시군만 아군함대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었다. 11월 14일 순천 고니시군은 명나라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면서 간청하였으나 오로지 구국일념으로 조명연합함대는 왜군 전선의 퇴로를 차단하니 순천 고니시는 시마즈군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11월 18일 6시경 창선도에 집결한 일본군과 거제도와 부산에 집결한 일본군은 500여척으로 전선을 재편성하여 순천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노량해협으로 진격하였다.

11월 18일 밤 12시에 이충무공은 원사기 밑에서 청수로 손을 씻고 백단향을 피운 다음 축천기도하기를“이 나라를 위해 적을 섬멸할 수 있다 하오면 죽어도 또한 한이 없겠나이다” 하였다. 이때에 큰 별 하나가 하늘에서 바다 위로 떨어지니 도열하고 있던 군사와 장수들은 이상한 감애에 사로 잡혔다.

11월 19일 밤 2시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 함선 200여척이 격파 당하게 되자 일본군은 전투에 패(敗)하였음을 자인(自認)하였고 50여척은 도주를 하였지만 나머지는 관음포구에 갇혀 퇴로가 차단되면서 최후의 발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승부가 결정되어 있었다. 오전 10시경에 이충무공은 독전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퇴로가 차단된 관음포 일본군은 함대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을 하였고 순천 고니시군도 여수 앞바다를 통하여 도주하였다. 이순신장군은 관음포 앞바다에서 승전으로 종전하였고 이순신 장군의 영구(靈柩)가 처음으로 육지에 오른 곳이 이곳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이다. 공이 순국한지 234년이 지난 순조 32년(1832)에 공의 8세손 이항권이 통제사로 래임하여 왕명으로 단(壇)을 모아 제사하였으며, 비와 비각을 세워 추모하고 이락사라 명하였다. 비명(碑名)은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증의정부영의정시충무이공순신유허비(有明水軍都督朝鮮國三道統制使贈議政府領義政諡忠武李公舜臣遺墟碑)”라 새겨져 있다. 예조판서겸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洪奭周)가 찬(撰)하고 형조판서겸 예문관 제학 이익회(李翊會)가 서(書)하였다.

1965년 4월 13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이락사(李落祠)와 대성운해(大星隕海.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를 친필로 쓰서 현판(懸板) 하였다. 1950년에 이충무공 전적 한글비를 세웠으며, 1991년 2월 16일에 유허 비각이 있는 곳에서 500m정도 능선을 따라 바다 쪽을 향하면, 임진왜란 당시 치열했던 광양바다와 노량해협 그리고 관음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첨망대(瞻望臺)를 2층 누각으로 건립하였다.  

그리고 입구 잔디광장에는 이충무공께서 유언한 “전방급신물언아사(戰方急愼勿言我死)”라는 글씨로 높이 8m의 자연석 유언비가 1998년 12월 16일(음 11월19일) 이충무공 순국400주년 추모식전에서 제막 되었다. 글씨는 해군 대장 유삼남 참모총장의 휘호이다. 이락사의 소유는 (사단법인)남해충렬사이며, 남해군에서 사적지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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